본문 바로가기
논어 한 장씩 읽기

학이편(學而篇) 제15장 | 가난해도 비굴하지 않고, 부유해도 교만하지 않다면

by Dr. Ryu | 논어 2026. 8. 31.

원문

子貢曰:「貧而無諂,富而無驕,何如?」子曰:「可也。未若貧而樂,富而好禮者也。」子貢曰:「詩云:『如切如磋,如琢如磨。』其斯之謂與?」子曰:「賜也,始可與言詩已矣!告諸往而知來者。」

독음

자공왈: “빈이무첨, 부이무교, 하여?”
자왈: “가야. 미약빈이락, 부이호례자야.”
자공왈: “시운: ‘여절여차, 여탁여마.’ 기사지위여?”
자왈: “사야, 시가여언시이의! 고저왕이지래자.”

 

簡體字

子贡曰:“贫而无谄,富而无骄,何如?”子曰:“可也。未若贫而乐,富而好礼者也。”子贡曰:“诗云:‘如切如磋,如琢如磨。’其斯之谓与?”子曰:“赐也,始可与言诗已矣!告诸往而知来者。”

Pinyin

Zǐ Gòng yuē: “Pín ér wú chǎn, fù ér wú jiāo, hé rú?”
Zǐ yuē: “Kě yě. Wèi ruò pín ér lè, fù ér hào lǐ zhě yě.”
Zǐ Gòng yuē: “Shī yún: ‘Rú qiē rú cuō, rú zhuó rú mó.’ Qí sī zhī wèi yú?”
Zǐ yuē: “Cì yě, shǐ kě yǔ yán Shī yǐ yǐ! Gào zhū wǎng ér zhī lái zhě.”


문장 전체를 직역하면

자공이 말했다.

“가난하면서도 아첨하지 않고, 부유하면서도 교만하지 않으면 어떻습니까?”

공자가 말했다.

“괜찮다. 그러나 가난하면서도 즐거워하고, 부유하면서도 예를 좋아하는 사람만은 못하다.”

자공이 말했다.

“『시경』에서 ‘자르는 듯하고 다듬는 듯하며, 쪼는 듯하고 가는 듯하다’라고 한 것이 바로 이런 뜻입니까?”

공자가 말했다.

“사(賜)야, 이제야 비로소 너와 함께 『시경』을 이야기할 만하구나. 지나간 것을 일러주니 앞으로 올 것을 아는구나.”


문법으로 읽어보기

1. 貧而無諂,富而無驕,何如

빈이무첨, 부이무교, 하여

 

은 ‘가난하다’, 는 ‘부유하다’라는 뜻이다. 는 앞뒤의 내용을 이어주는 접속의 역할을 하며, 無諂은 ‘아첨함이 없다’, 無驕는 ‘교만함이 없다’는 뜻이다.

여기에서 은 단순히 다른 사람에게 친절하게 대한다는 뜻이 아니다. 자신의 처지 때문에 상대에게 비굴하게 굽히거나 환심을 사려는 태도를 가리킨다. 반대로 는 자신이 가진 재산이나 지위 때문에 다른 사람보다 자신을 높이고 거만하게 행동하는 태도를 의미한다.

따라서 자공의 질문은 단순히 가난과 부유함을 비교하는 것이 아니다.

환경이 달라져도 자신의 태도를 잃지 않는 사람이 좋은 사람인가를 묻고 있는 것이다.

何如는 ‘어떠한가’, ‘어떻습니까?’라는 뜻으로 상대의 평가를 묻는 표현이다.

 

문장의 구조를 나누어 보면,

貧 / 而 / 無諂
가난하지만 / 그리고 / 아첨하지 않는다

 

富 / 而 / 無驕
부유하지만 / 그리고 / 교만하지 않는다

何如
어떠합니까?

 

한자 뜻과 읽기

貧(가난할 빈) · 而(말 이을 이) · 無(없을 무) · 諂(아첨할 첨) · 富(부유할 부) · 驕(교만할 교) · 何(어찌 하) · 如(같을 여)

 

2. 可也。未若貧而樂,富而好禮者也

가야. 미약빈이락, 부이호례자야

 

공자는 자공의 질문에 먼저 可也, 즉 “괜찮다”, “그 정도면 좋다”라고 대답한다. 자공이 제시한 태도를 부정하지 않은 것이다.

그러나 곧이어 未若이라고 한다. 는 ‘아직 ~하지 못하다’, 은 ‘~와 같다, ~만 하다’라는 뜻이므로 未若은 ‘아직 ~만은 못하다’라는 의미가 된다.

 

그렇다면 무엇보다 못하다는 것일까.

貧而樂은 가난하면서도 즐거움을 잃지 않는 것이며, 富而好禮는 부유하면서도 예(禮)를 좋아하고 따르는 것이다.

여기에는 미묘하지만 중요한 차이가 있다.

 

아첨하지 않는 것과 교만하지 않는 것은 나쁜 태도를 억제하는 단계라면, 가난 속에서도 즐거움을 찾고 부유함 속에서도 예를 좋아하는 것은 자신의 삶을 보다 적극적으로 좋은 방향으로 이끄는 단계라고 볼 수 있다.

주희 역시 『논어집주』에서 ‘아첨하지 않고 교만하지 않는 것’은 자신을 지키는 단계이지만, 아직 빈부의 조건을 완전히 넘어선 것은 아니라고 설명한다.

 

문장의 구조를 나누어 보면,

可 / 也
괜찮다 / ~이다

 

未若 / 貧而樂
아직 ~만 못하다 / 가난하면서도 즐거워하는 것

 

富而好禮 / 者也
부유하면서도 예를 좋아하는 / 사람만은

 

한자 뜻과 읽기

可(옳을 가) · 也(어조사 야) · 未(아닐 미) · 若(같을 약) · 貧(가난할 빈) · 樂(즐길 락) · 富(부유할 부) · 好(좋아할 호) · 禮(예도 례) · 者(놈 자)

 

3. 如切如磋,如琢如磨

여절여차, 여탁여마

 

이 구절은 자공이 『시경』의 구절을 인용한 것이다.

은 자르는 것, 는 잘라낸 것을 다시 다듬는 것, 은 옥이나 돌을 쪼아 형태를 만드는 것, 는 그것을 다시 갈아 매끄럽게 만드는 것을 뜻한다.

 

따라서 문자 그대로는 “자르는 듯하고 다시 다듬는 듯하며, 쪼는 듯하고 다시 가는 듯하다.” 라는 뜻이다. 중요한 것은 한 번의 작업으로 끝나지 않는다는 점이다. 자르고 나서 다시 다듬고, 쪼고 나서 다시 간다. 이미 어느 정도 형태가 만들어졌더라도 거기에서 멈추지 않고 더 정교하게 다듬어가는 과정이다. 『논어집주』에서도 이 구절을 이미 정교해진 것을 다시 더욱 정교하게 만드는 뜻으로 풀이한다.

 

자공은 공자의 대답을 듣고 이 『시경』의 구절을 떠올린다. ‘가난해도 아첨하지 않고 부유해도 교만하지 않는 것’에서 멈추지 말고, 다시 ‘가난해도 즐거워하고 부유해도 예를 좋아하는 것’으로 한 단계 더 나아가야 한다는 뜻으로 이해한 것이다.

 

한자 뜻과 읽기

如(같을 여) · 切(끊을 절) · 磋(갈 차) · 琢(쪼을 탁) · 磨(갈 마)

 

4. 其斯之謂與

기사지위여

 

는 추측이나 반문을 나타내는 어감을 가지며, 는 ‘이것’, 之謂는 ‘~을 이르는 것’, 즉 ‘~을 말하는 것’이라는 뜻이다.

따라서 전체적으로는 “바로 이것을 말하는 것입니까?” 라는 의미가 된다.

 

자공은 공자가 직접 설명하지 않은 의미를 스스로 한 단계 더 확장하여 이해하고 있다. 바로 이 점이 뒤에 나오는 공자의 칭찬으로 이어진다.

 

한자 뜻과 읽기

其(그 기) · 斯(이 사) · 之(갈 지) · 謂(이를 위) · 與(어조사 여)

 

5. 賜也,始可與言詩已矣

사야, 시가여언시이의

 

는 자공의 이름이다. 공자가 제자인 자공을 이름으로 부르고 있는 것이다. 始可는 ‘비로소 ~할 수 있다’, 與言詩는 ‘함께 『시경』을 이야기하다’라는 뜻이다.

 

공자가 자공을 칭찬한 이유는 단순히 자공이 『시경』의 구절을 많이 알고 있었기 때문이 아니다. 공자가 한 가지를 말하자 자공은 그 말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데서 멈추지 않고, 자신이 알고 있던 『시경』의 구절과 연결하여 새로운 의미를 스스로 발견했다.

그래서 공자는 이제 자공과 『시경』을 함께 이야기할 만하다고 말한다.

 

한자 뜻과 읽기

賜(줄 사) · 也(어조사 야) · 始(비로소 시) · 可(옳을 가) · 與(더불 여) · 言(말씀 언) · 詩(시 시) · 已(이미 이) · 矣(어조사 의)

 

6. 告諸往而知來者

고저왕이지래자

 

는 ‘알려주다’, 은 이미 지나간 것, 는 앞으로 오는 것을 뜻한다. 여기에서 는 문맥상 ‘그에게’라는 의미로 이해할 수 있다. 따라서 전체적인 의미는 “지나간 것을 알려주면 앞으로 올 것을 아는 사람”이라는 뜻이다.

 

공자가 한 가지 의미를 설명했는데 자공은 거기에서 다음 의미를 스스로 알아냈다. 이는 단순한 암기와는 다른 배움이다.

배운 것을 바탕으로 아직 배우지 않은 것까지 스스로 생각해내는 능력을 공자는 높이 평가하고 있는 것이다.

 

한자 뜻과 읽기

告(고할 고) · 諸(모두 제) · 往(갈 왕) · 而(말 이을 이) · 知(알 지) · 來(올 래) · 者(놈 자)


뜻을 풀어 읽기

이 장은 처음에는 가난과 부유함에 관한 이야기처럼 보인다. 자공은 공자에게 “가난하면서도 아첨하지 않고, 부유하면서도 교만하지 않는다면 어떻습니까?”라고 묻는다. 오늘날의 기준으로 보아도 상당히 훌륭한 태도이다. 어려운 형편에서도 비굴해지지 않고, 많은 것을 가지고도 다른 사람을 무시하지 않는다면 그것만으로도 쉽지 않은 일이다.

 

공자도 그것을 인정한다. 「可也」, 괜찮다고 말한다. 그러나 거기에서 끝나지 않는다.

「未若貧而樂,富而好禮者也」가난하면서도 즐거워하고, 부유하면서도 예를 좋아하는 사람만은 못하다고 한다.

 

두 상태의 차이를 생각해 보면 이 장의 의미가 조금 더 분명해진다. ‘아첨하지 않는다’와 ‘교만하지 않는다’에는 하지 말아야 할 것을 하지 않는 태도가 담겨 있다. 반면 ‘즐거워한다’와 ‘예를 좋아한다’에는 자신의 처지를 넘어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를 적극적으로 선택하는 태도가 담겨 있다.

 

가난하기 때문에 비굴해지지 않는 것도 어렵지만, 가난이라는 조건 자체에 마음을 빼앗기지 않고 자신의 삶에서 즐거움을 찾는 것은 한 단계 더 어려운 일이다. 부유하면서 교만하지 않는 것도 훌륭하지만, 자신의 부유함에 머물지 않고 오히려 다른 사람을 존중하고 예를 즐겨 실천하는 것은 또 다른 수준의 삶이다.

 

그 말을 들은 자공은 곧바로 『시경』의 한 구절을 떠올린다.

「如切如磋,如琢如磨」

자르고 또 다듬으며, 쪼고 또 간다는 말이다.

 

사람도 마찬가지라는 것이다. 어느 정도 좋은 사람이 되었다고 해서 완성되는 것이 아니다. 자신을 한 번 다듬었다면 다시 살펴보고, 어느 정도 성장했다면 거기에서 다시 한 단계 더 나아가야 한다. 그래서 이 장은 가난과 부유함에 대한 교훈을 넘어 배움과 성장에는 끝이 없다는 이야기로 이어진다.


배경과 맥락

학이편 제15장은 자공의 질문으로 시작하지만, 그 중심에는 배움의 깊이라는 학이편 전체의 중요한 주제가 놓여 있다.

자공(子貢)은 공자의 대표적인 제자 가운데 한 사람으로, 이름은 단목사(端木賜)이다. 이 장에서 공자가 그를 라고 부르는 것도 그의 이름을 직접 부른 것이다.

 

전통적인 주석에서는 자공이 상업 활동에도 능했고 재산을 이루었던 인물이라는 점을 이 대화와 연결하여 해석하기도 한다. 주희의 『논어집주』 역시 자공이 재산을 늘리는 데 능했고 가난과 부유함을 모두 경험했을 가능성을 언급하며, 그가 자신의 삶과 관련하여 이 질문을 던졌다고 풀이한다. 그러나 이 장에서 더 중요한 것은 공자의 대답을 받아들이는 자공의 방식이다.

 

공자는 “가난해도 아첨하지 않고 부유해도 교만하지 않는 것”보다 더 높은 단계가 있다고 말했을 뿐이다. 그런데 자공은 그 말을 듣고 『시경』의 **「如切如磋,如琢如磨」**를 떠올린다.

 

이 구절은 『시경』 「위풍·기욱(衛風·淇奧)」에 나오는 표현으로, 뼈와 뿔을 자르고 다듬으며 옥과 돌을 쪼고 가는 모습을 통해 끊임없이 자신을 연마하는 모습을 연상시킨다. 『논어집주』 역시 이를 이미 정교해진 것에서 다시 더욱 정교함을 구하는 과정으로 설명한다.

 

공자가 자공에게 「始可與言詩已矣」, 이제 너와 『시경』을 이야기할 수 있겠다고 한 이유도 여기에 있다.

『시경』의 문장을 외웠기 때문이 아니다.

 

한 가지를 배우고 그 의미를 다른 곳에 연결하여 스스로 다음 단계까지 생각했기 때문이다.

학이편 제1장의 「學而時習之」에서 시작된 배움이 여기에서는 단순히 배우고 반복하는 차원을 넘어, 배운 것을 바탕으로 새로운 의미를 발견하는 배움으로 깊어지고 있다.


Dr. Ryu’s Reflection

이 장을 읽으면서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 것은 “가난해도 아첨하지 않고 부유해도 교만하지 않는다”는 자공의 말이다. 이것만으로도 충분히 훌륭하지 않은가 하는 생각이 든다. 어려울 때 비굴해지지 않는 것도 쉽지 않고, 형편이 좋아졌을 때 자신을 낮추는 것도 생각보다 어렵다. 사람의 태도는 자신의 환경과 무관하다고 생각하기 쉽지만, 실제 삶에서는 우리가 가진 것과 가지지 못한 것이 생각보다 자주 우리의 말과 행동을 바꾸어 놓는다.

 

그런데 공자는 거기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간다. 가난하면서도 즐거워하고, 부유하면서도 예를 좋아하는 사람이 더 낫다고 말한다. 처음에는 그 차이가 크지 않아 보일 수도 있다. 하지만 오래 생각해 보면 두 상태 사이에는 꽤 깊은 차이가 있다. 나쁜 행동을 하지 않는 것과 좋은 삶을 스스로 만들어가는 것은 같은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살아오면서 나 역시 사람의 형편이 변하면 태도도 달라지는 경우를 적지 않게 보았다. 어려울 때는 겸손하던 사람이 형편이 좋아진 뒤 다른 사람을 대하는 방식이 달라지기도 하고, 반대로 어려운 상황 때문에 자신의 자존감을 잃고 지나치게 다른 사람의 눈치를 보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어떤 사람들은 환경이 변해도 크게 흔들리지 않는다. 가진 것이 많든 적든 사람을 대하는 태도가 비슷하고, 자신이 해야 할 일을 묵묵히 한다.

 

나이가 들수록 나는 그런 사람이 더 강한 사람이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하지만 이번 장에서 내게 더 오래 남는 부분은 뒤에 이어지는 **「如切如磋,如琢如磨」**이다. 자르고 또 다듬고, 쪼고 또 간다는 말이다. 한 번 다듬었다고 끝나는 것이 아니다.

 

돌이켜보면 우리의 삶도 그런 과정이 아니었나 싶다. 학교를 졸업했다고 배움이 끝난 것도 아니었고, 학위를 받았다고 공부가 끝난 것도 아니었다. 한 나라에서 오래 살았다고 그 나라를 모두 알게 된 것도 아니었으며, 어떤 일을 오랫동안 했다고 해서 더 이상 배울 것이 없어진 것도 아니었다. 새로운 환경에 들어갈 때마다 이전에 알고 있던 것을 다시 생각해야 했고, 때로는 오랫동안 옳다고 생각했던 방식까지 수정해야 했다.

 

요즘 새로운 기술과 AI를 배우면서도 비슷한 생각을 한다. 처음에는 하나의 기능을 익히는 것만으로도 큰 진전처럼 느껴지지만, 조금 지나면 그다음 단계가 보인다. 하나를 해결하면 또 다른 문제가 나타나고, 그것을 해결하고 나면 처음에는 보이지 않았던 더 나은 방법이 보인다. 배움이라는 것이 어쩌면 바로 이런 과정인지도 모른다. 그래서 나는 공자가 자공에게 한 마지막 말이 특히 좋다.

「告諸往而知來者」 하나를 알려주었더니 그다음을 알아낸다는 것이다.

 

좋은 배움은 누군가가 알려주는 것을 정확하게 기억하는 데서 끝나지 않는다. 배운 것을 자신의 경험과 연결해 보고, 다른 문제에 적용해 보고, 거기에서 아직 배우지 않은 것을 스스로 발견할 수 있어야 한다.

 

2500여 년 전 공자와 자공의 짧은 대화를 오늘의 말로 바꾸어 보면 이런 질문처럼 들린다.

나는 지금 알고 있는 것에 만족하고 있는가, 아니면 한 번 더 다듬고 있는가.

 

나이가 들수록 이미 쌓아놓은 경험과 지식이 많아진다. 그래서 어느 순간부터는 새롭게 배우기보다 내가 알고 있는 것으로 세상을 설명하려 하기 쉽다. 하지만 「如切如磋,如琢如磨」는 완성되었다고 생각하는 바로 그 지점에서 다시 자신을 다듬으라고 말하는 것 같다.

 

인생의 후반부라고 해서 다듬는 일이 끝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지금까지 살아오며 만들어진 나 자신을 다시 바라보고, 필요하다면 조금씩 고쳐가며, 새로운 것을 받아들일 수 있는 시기일지도 모른다.

배움은 완성되는 것이 아니라, 조금씩 더 깊어지는 것이다. 나는 학이편 제15장을 이렇게 읽고 싶다.


참고

  • 『論語』, 「學而篇」 제15장.
  • 朱熹, 『四書章句集注』, 「論語集注」 學而篇 제15장.
  • 『詩經』, 「衛風·淇奧」.
  • Chinese Text Project, The Analects: Xue Er, Chapter 15.
  • 한국고전번역원, 고전 관련 한문·한자 자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