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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정편(爲政篇) 제16장 | 배움의 길에서 중심을 잃지 말라

Dr. Ryu | 논어 2026. 9. 8. 19:00

원문

子曰:「攻乎異端,斯害也已。」

독음

자왈: “공호이단, 사해야이.”

 

簡體字

子曰:“攻乎异端,斯害也已。”

Pinyin

Zǐ yuē: “Gōng hū yìduān, sī hài yě yǐ.”


문장 전체를 직역하면

공자가 말했다.

“다른 갈래의 학문에 몰두하는 것은 해가 될 뿐이다.”


문법으로 읽어보기

1. 攻乎異端

공호이단

이번 장에서 가장 먼저 주의해야 할 글자는 이다. 오늘날 攻을 보면 ‘공격하다’라는 뜻이 먼저 떠오르지만, 전통적인 『논어』 주석에서는 이 글자를 그렇게 읽지 않았다. 하안(何晏)의 주석에서는 「攻,治也」, 곧 ‘연구하다, 닦다’라는 뜻으로 풀이하고, 주희의 『논어집주』에서도 범씨(范氏)의 말을 인용하여 「攻,專治也」, 즉 한 분야를 전적으로 파고들어 연구하는 것이라고 설명한다. 주희는 『주자어류』에서도 다시 “여기의 攻은 공격한다는 뜻이 아니라 講習, 곧 배우고 익힌다는 뜻”이라고 분명히 말한다.

는 여기에서 ‘~에, ~에 대하여’라는 관계를 나타내는 말로 볼 수 있다.

문제가 되는 것은 異端이다. 는 ‘다르다’, 은 ‘끝, 단서, 한쪽 갈래’를 뜻하므로 글자 그대로 보면 ‘다른 갈래’ 정도의 의미이다. 후대에는 異端이 흔히 ‘이단’이라는 강한 종교적·사상적 의미로 사용되었지만, 이 구절을 처음부터 오늘날의 ‘이단 사상’이라는 뜻으로만 읽으면 후대의 의미를 원문에 그대로 가져올 위험이 있다.

전통 주석에서는 異端을 바른 도에서 벗어나 따로 한 갈래를 이루는 학설로 이해했다. 『논어주소』에서는 이를 후대의 여러 학파와 연결했고, 주희 역시 양주·묵가 등을 예로 들면서 성인의 도와 다른 한쪽의 학설이라고 풀이하였다.

문장의 구조를 나누어 보면,

攻 / 乎 / 異端
전적으로 연구하다 / ~에 / 다른 갈래의 학문을

즉, 전통적 해석에 따르면 “다른 갈래의 학문을 전적으로 파고들어 연구한다”라는 뜻이다.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단순히 다른 생각을 접하는 것 자체를 금지했다는 의미로 확대하지 않는 것이다. 전통 주석이 강조한 것은 자신이 배워야 할 중심을 놓친 채 다른 갈래에 몰두하고 빠져드는 것에 더 가깝다.

한자 뜻과 읽기

攻(칠 공, 다스릴 공) · 乎(어조사 호) · 異(다를 이) · 端(끝 단)

2. 斯害也已

사해야이

는 ‘이것, 곧 이것은’, 는 ‘해가 되다, 해치다’라는 뜻이다. 也已는 문장의 판단을 마무리하면서 뜻을 한정하거나 강조하는 어조로 쓰인다. 이 문맥에서는 “해가 될 뿐이다”, “해로울 뿐이다” 정도로 이해할 수 있다.

『논어주소』는 바른 배움을 놓아두고 다른 갈래의 학문을 깊이 파고들면 그것이 결국 큰 해가 된다고 설명한다. 주희의 『논어집주』 역시 異端을 전적으로 연구하여 그 학문에 깊이 빠지는 것이 학자에게 해가 된다는 방향으로 풀이한다.

문장의 구조를 나누어 보면,

斯 / 害 / 也已
이것은 / 해가 된다 / 그뿐이다

즉, “이것은 해가 될 뿐이다”라는 뜻이다.

따라서 전통적 해석에 따라 문장 전체를 연결하면,

「攻乎異端,斯害也已。」

“자신이 가야 할 바른 배움에서 벗어나 다른 갈래의 학문에 몰두하는 것은 결국 해가 될 뿐이다”라는 뜻으로 읽을 수 있다.

다만 이 구절에는 다른 해석도 존재한다. 후대 일부 학자들은 攻을 ‘공격하다’로 읽어 “자신과 다른 견해를 공격하는 것이 오히려 해가 된다”고 풀이하기도 했으며, 또 異端을 서로 다른 양쪽 끝이나 한쪽에 치우친 견해로 보는 해석도 제시되었다. 실제로 이 짧은 문장은 오랫동안 여러 방향으로 해석되어 왔다.

그러나 『논어주소』와 주희를 비롯한 대표적인 전통 주석에서는 攻을 ‘공격’이 아니라 ‘연구하고 전적으로 파고듦’으로 읽는 해석이 중심이었다는 점은 분명히 구분해 둘 필요가 있다.

한자 뜻과 읽기

斯(이 사) · 害(해칠 해) · 也(어조사 야) · 已(이미 이)


뜻을 풀어 읽기

이번 장은 겨우 여덟 글자밖에 되지 않지만, 『논어』에서도 해석에 특히 주의해야 하는 문장 가운데 하나이다.

「攻乎異端,斯害也已。」

후대에 異端이라는 말이 강한 의미를 갖게 되면서 이 문장은 종종 “이단을 공격하라”는 식으로 이해되기도 했다. 그러나 전통적인 『논어』 주석에서 攻은 공격한다는 뜻이 아니라 어떤 학문을 깊이 연구하고 전적으로 파고드는 것으로 풀이되었다. 주희 역시 이 점을 명확하게 강조했다.

그렇게 읽으면 공자가 경계한 것은 다른 생각의 존재 자체가 아니다.

문제는 자신이 무엇을 배우고 어디로 가야 하는지 중심을 잃은 채 다른 갈래에 깊이 빠져드는 것이다.

배움에는 폭이 필요하다. 여러 사람의 이야기를 듣고 다양한 관점을 접하는 것도 중요하다. 그러나 이것저것 새로운 것만 찾아다니다 보면 정작 자신이 배우려던 것이 무엇인지 흐려질 수도 있다. 호기심에서 시작한 작은 곁길이 어느 순간 중심이 되고, 원래의 공부는 뒤로 밀려나는 경우도 있다.

앞 장에서 공자는 **「學而不思則罔,思而不學則殆」**라고 하여 배움과 생각의 균형을 말했다. 바로 이어지는 이번 장에서는 배움의 또 다른 위험을 이야기한다고 읽어볼 수 있다.

배우고 생각하는 것만큼이나 무엇을 중심으로 배울 것인가도 중요하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이 장을 “내 생각과 다른 것은 모두 멀리하라”는 말로 읽을 필요는 없다. 오히려 그렇게 읽으면 바로 앞에서 공자가 말해 온 깊이 있는 배움과도 잘 어울리지 않는다. 다른 관점을 아는 것과 거기에 자신의 중심을 모두 맡기는 것은 서로 다른 문제이다.

따라서 이 장의 핵심을 오늘의 말로 조금 넓혀 읽으면 이렇게 정리해 볼 수 있다.

여러 길을 보되, 자신이 걸어가야 할 중심을 잃지 말라.

새로운 것을 접하는 것은 배움이지만, 방향 없이 끌려다니는 것은 배움과 다를 수 있다.


배경과 맥락

이 구절은 『논어』 위정편 제16장으로, 원문은 **「攻乎異端,斯害也已。」**이다. Chinese Text Project에서도 이 형태로 확인된다.

이번 장은 특히 후대 해석의 영향을 구분해서 볼 필요가 있다. 『논어주소』는 攻을 , 곧 ‘연구하고 닦다’라는 뜻으로 설명하고, 異端을 바른 경전의 도와 다른 방향으로 나아가는 학문으로 풀이하였다. 여기에서는 후대의 제자백가를 예로 들어 설명한다.

주희의 『논어집주』에서도 기본 방향은 같다. 그는 범씨의 말을 인용하여 攻을 專治, 곧 전적으로 연구하는 것이라고 하고, 異端을 성인의 도가 아닌 다른 한 갈래의 학설로 설명한다. 여기에서는 양주와 묵가를 대표적인 사례로 들며, 정이의 설명을 통해 불교까지 이어서 언급한다.

그러나 여기에서 한 가지 구분할 필요가 있다. 양주·묵가·불교는 공자의 원문 자체에 등장하는 대상이 아니라 후대 주석가들이 異端의 의미를 설명하면서 든 사례들이다. 따라서 공자가 이 한 문장에서 후대의 특정 사상이나 종교를 직접 지목했다고 이해해서는 안 된다.

더욱이 이 구절은 후대에도 해석이 한 가지로만 고정되지 않았다. 攻을 ‘공격하다’로 읽어 “다른 견해를 공격하는 것이 해롭다”고 보는 해석, 異端을 서로 다른 두 극단으로 이해하는 해석 등 여러 견해가 제시되어 왔다. 관련 연구에서도 이 문장의 대표적 해석을 크게 몇 갈래로 구분할 정도로 논쟁이 계속되어 왔다.

이 때문에 이번 장에서는 특정 현대적 의미를 원문에 단정적으로 씌우기보다, 대표적인 전통 해석을 먼저 이해하고 다른 해석이 존재한다는 사실도 함께 기억하는 것이 중요하다.

위정편의 흐름으로 보면 직전 제15장이 學과 思의 관계를 다루었고, 이번 제16장 역시 배움의 방향에 관한 문제로 읽을 수 있다. 다음 제17장에서는 다시 자로에게 “아는 것을 안다고 하고 모르는 것을 모른다고 하는 것이 앎이다”라고 말한다. 이 세 장을 하나의 의도된 연속 구조라고 단정할 수는 없지만, 위정편의 이 대목에서 공자가 배움의 방법, 방향, 그리고 앎을 대하는 태도를 차례로 생각하게 한다는 점은 흥미롭다.


Dr. Ryu’s Reflection

이번 장은 처음 읽으면 조금 불편하게 느껴질 수도 있다.

「攻乎異端,斯害也已。」

‘다른 생각을 공부하면 해롭다’는 말처럼 들리기 때문이다. 지금처럼 여러 생각과 다양한 문화, 서로 다른 가치관을 접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여기는 시대에는 더욱 그렇다.

나 역시 오랫동안 여러 나라에서 생활하고 공부하면서 서로 다른 문화와 생각을 접하는 경험이 중요하다고 생각해 왔다. 한 나라 안에서만 살아서는 당연하게 여겼던 것이 다른 나라에 가면 전혀 당연하지 않을 수도 있고, 내가 옳다고 믿었던 방식이 다른 사회에서는 여러 방법 가운데 하나일 뿐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그런 경험을 생각하면 공자의 말을 단순히 “다른 생각을 멀리하라”고 읽고 싶지는 않다.

오히려 이번 장에서 내게 더 중요하게 다가오는 것은 ‘다른 것’보다 ‘몰두한다’는 부분이다.

관심이 생겨 다른 것을 살펴보는 것과 자신의 중심을 잃고 거기에 빠져드는 것은 다르다.

요즘은 특히 그렇다. 인터넷을 열면 새로운 정보가 끝없이 나온다. 하나를 찾아보다가 다른 글을 읽고, 거기에서 또 다른 영상으로 넘어간다. 처음에는 무엇인가를 배우기 위해 시작했는데 한참 뒤 돌아보면 정작 무엇을 공부하려 했는지 잊어버릴 때도 있다.

새로운 것은 언제나 흥미롭다.

이미 알고 있는 것을 오래 공부하는 일보다 새로운 것을 만나는 일이 더 자극적일 수도 있다. 그래서 하나의 분야를 깊이 공부하기보다 계속 새로운 주제를 옮겨 다니는 일이 더 쉬울 때도 있다.

나 자신도 새로운 일을 시작할 때 이런 위험을 느낀다. 새로운 기술을 배우거나 새로운 프로젝트를 진행하다 보면 사용할 수 있는 도구와 방법이 끝없이 보인다. 하나를 충분히 익히기도 전에 더 좋아 보이는 다른 것을 찾고 싶어진다.

그러다 보면 어느 순간 배우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새로운 것을 찾아다니는 것 자체가 목적이 될 수도 있다.

그런 의미에서 이번 장은 나에게 “다른 것을 보지 말라”는 말보다 “중심을 잃지 말라”는 경계로 읽힌다.

중심이 있는 사람은 다른 것을 볼 수 있다. 오히려 다른 것을 보면서 자신의 생각을 더 깊게 만들 수도 있다. 그러나 중심이 없으면 새로운 것을 만날 때마다 방향이 바뀌기 쉽다.

이 점은 나이가 들어 새로운 배움을 시작할 때도 중요할 것 같다.

평생 한 길만 가야 한다는 뜻은 아니다. 새로운 길을 선택할 수도 있고, 이전에 하던 일을 내려놓고 전혀 다른 일을 시작할 수도 있다. 인생 제2막이라는 것도 어쩌면 그런 변화에서 시작된다.

하지만 새로운 길을 선택하는 것과 방향 없이 이 길 저 길을 따라다니는 것은 다르다.

왜 이것을 배우는지, 내가 무엇을 하려는지, 지금의 배움이 내 삶에서 어떤 의미가 있는지를 가끔 다시 확인할 필요가 있다.

공자가 말한 異端을 오늘의 모든 ‘다른 생각’과 그대로 같다고 할 수는 없겠지만, 이번 구절은 내게 한 가지 질문을 남긴다.

나는 새로운 것을 배우고 있는가, 아니면 새로움 자체를 좇느라 내가 가려던 길을 잊고 있는가?

여러 길을 볼 수 있는 것은 좋은 일이다.

그러나 결국 걸어가려면 자신이 어느 길 위에 서 있는지는 알고 있어야 한다.


참고

  • 『論語』, 「爲政篇」 제16장.
  • 何晏 注, 邢昺 疏, 『論語注疏』, 「爲政第二」.
  • 朱熹, 『四書章句集注』, 「論語集注·爲政第二」.
  • 朱熹, 『朱子語類』, 「論語六·爲政篇下·攻乎異端章」.
  • Chinese Text Project, The Analects: Wei Zheng.